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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봄비가 왔다고 블로그에 글까지 써놓았는데
밤에 갑자기 눈이 내려 조금 당황했습니다.
서울은 금세 다시 차가워졌고
공기도 다시 겨울 쪽으로 기울더군요.
하루 사이에도 계절은 이렇게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어쩌면 요즘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들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바뀐 것 같지만,
안쪽에서는 아직 천천히 남아 있는 것들 말입니다.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가,
소장용으로 사두었던 LP를 다시 꺼내봤습니다.
훗날 LP 플레이어를 살 것이라 다짐할 때
구매했던 앨범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들을 수도 없고,
지금의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LP만큼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당장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끝내 남겨두게 되는 것들.
빨리 쓰이고 빨리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유독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요즘 본질이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더 새롭고, 더 눈에 띄고,
더 많은 기능을 가진 것이 좋은 것처럼
여길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너무 많은 것이 너무 빠르게 만들어지고,
취향조차 금세 복제되는 시대가 되면서
오히려 사람들은 다른 쪽을 보게 됩니다.
더 화려한 것보다 더 진짜 같은 것,
오래 곁에 둘 수 있는 것,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스스로 납득되는 것을 찾게 되는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말하는 본질은
단순히 덜어내자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미니멀하게 살자는 유행도 아니고,
옛날 것이 무조건 더 낫다는 태도도 아닙니다.
너무 많은 선택과 너무 빠른 변화 속에서도
내가 왜 이걸 좋아하는지,
왜 이걸 남겨두고 싶은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상태.
아마 지금의 본질은 그런 감각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 LP도 제게는 그런 물건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직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앨범이지만
이미 제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결국 본질이란 가장 단순한 것을 고르는 일이라기 보다는
끝까지 남겨둘 이유가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인것 같아요.
어제 봄비를 보며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생각했다가
밤사이 다시 내린 눈에 조금 머쓱해졌듯이
저는 자주 너무 빨리 단정합니다.
그렇지만 계절도, 마음도, 취향도
생각보다 더 천천히 움직인다는걸 알죠.
그래서 오래 남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개,
그렇게 끝까지 남아 있는 쪽에서 보이니까요.